자신의 재능에서 미래를 찾았다면 그는 일찌감치 화가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 공을 만들어 팔아 ‘볼(ball)집 아이’로 불렸던 그는 해방 후 척박한 시기에 자신의 특기를 앞세워 살 수 없었다.
꿈보다는 현실을 택해야 했다. 5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와 집안의 장래를 위해 그는 약대로 진학했다.
약대를 졸업 후 그는 국내 유명 제약회사에 입사, 25년간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중상위권 회사를 굴지의 제약회사로 끌어올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그에 따른 고속 승진으로 30대에 중역이 됐다.
그리고 급기야 1982년 자신의 회사를 창업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회사를 전문의약품 분야에서 손꼽히는 기업으로 일궈낸 후 2005년 회사경영을 2세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부터 꿈꾸던 화가의 길로 다시 돌아온다.
지금 그는 또 한 번의 변신을 시도 중이다. 사재 100억 원을 들여 짓고 있는 그의 미술관이 내년 봄 여주 1만㎡(3000여 평) 부지에 들어선다.
‘그림 그리는 CEO’로 유명한 고려제약 박해룡(83) 회장의 이야기다. 그의 삶은 로버트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린다. 오래전 청춘의 번민 속에 꿈을 버렸지만 그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가지 못했던’ 그 길을 걷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잘된 그림은 뒤에 붙였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내 그림이었습니다.”
박 회장은 어릴 때부터 그림 소질이 남달랐다고 한다. 경동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고, 김진명 선생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의 실력을 알아본 김진명 선생은 그에게 미대 진학을 권유했다. 아마 그가 약대 대신 미대를 선택했다면 그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렸다.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하고 종근당 상무이사, 한국 메디카와한국롱프랑 제약 대표이사를 지낸 그는 1980년 고려제약을 설립했다. 그림이 꿈이었던 소년이 어떻게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인 기업 경영에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을까.
“경영과 미술은 ‘도전과 열정’이라는 코드로 통하기 때문에 제가 기업 경영에서 실패하지 않았던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매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기업 경영은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식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과정의 연속입니다.”
제약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고려제약을 중추신경계 관련 전문제약회사로 발돋움시켰다. 그가 CEO에 오르게 된 것은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AMP(최고경영자)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1년 회사에서 학비와 체재비까지 지원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받고 늦은 유학길에 올랐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난처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어요. 후배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제가 복귀하려면 몇 사람이 정든 자리를 떠나야 했었죠.”
마침 그때 종근당에서 박 회장을 이끌어주던 선배가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를 인수해달라고 했다.
47세 되던 1982년 퇴직금에 은행 빚을 더해 회사를 떠맡았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고려제약이다. 어찌 보면 ‘울며 겨자 먹기’식이었지만 그는 더 힘을 내 달렸다. 마치 그가 요즘 빠져 있는 말 그림 속의 ‘질주하는 말’처럼 그는 ‘제약업계’라는 그라운드에서 질주했다. 그는 3년 연속 적자를 내던 회사를 인수 첫해 흑자 회사로 바꾸었다. 연 매출 2억 원이던 회사가 1년 만에 5억 원으로 성장했고, 계속 발전을 거듭해 코스닥에 상장도 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그림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인사동 화랑가에서 그는 ‘큰손 컬렉터’로 통한다. 국내외 작가들의 회화 작품으로부터 조각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 모은 컬렉션만 400여 점에 이른다.
그처럼 남의 작품 앞에서 창작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만 했던 그가 급기야 방향을 튼다. 어느 날 홀연히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에서 손을 떼고 물감과 팔레트 그리고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앉는다.
주변에서는 그의 은퇴 소식에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사업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 드는 작품을 소장하는 것으로 달래온 그에게는 비록 아마추어지만 ‘화가의 길’은 어쩌면 ‘본업’으로 돌아왔다는 큰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어려서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미친 듯이 그림에 몰두했다. 당시 자신의 심정을 그는 “마른 가슴에 물이 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70세 무렵이었다. 그는 요즘도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거처인 아파트의 방 하나에 차려진 작업실에서 이젤 앞에 앉는다.
“소싯적부터 지녔던 미술의 꿈을 이학과 약학으로 채웠습니다. 한국전쟁과 이에 따른 재건으로 사회가 어수선할 때 미술은 사치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잿빛 삶에는 비록 오랫동안 굳어버린 것이지만 물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회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이 굳어진 물감에 기름을 붓고 붓을 휘저어 풀어놓은 것이죠.”
우선 중견 여성화가로 막내 여동생인 박경숙(68) 씨에게 기본기부터 익혔다. 사실 그의 그림에 대한 집착은 집안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바로 아래 동생은 유명 건축가이며 국민대 명예교수인 박길룡(72) 씨다. 우선 그는 미술의 기본기는 데생을 통해서 익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그리고 풍경화와 말 그림으로 표현 대상을 넓혀갔다.
“말을 그린다는 것은 바람을 그리는 것입니다. 말의 긴 갈기와 꼬리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진사(眞寫)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람은 빛을 흩날리고, 색(色)을 섞고, 형(形)을 번지게 합니다. 그러니까 바람은 말의 매질(媒質)입니다.”
사업이건 그림이건 그는 “말처럼 달리는 듯하다”고 한다. 붓을 잡고 풍경과 말 그림을 그리며 그는 국내외 스케치 명소를 어디건 찾아갔다. 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서귀포 말 서식지를 찾았고,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베트남 다낭부터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시칠리아, 미국 동부의 로드아일랜드 마을을 찾았다.
“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찾은 서식지는 일대 풍경도 아름답지만 특히 말들의 질주 본능과 역동성에 반했습니다.”
그렇게 그린 작품이 300여 점에 이르고 개인전도 10여 차례나 열었다. 그의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씨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그림은 소박하다. 그에게 그림은 기교가 아니라 진실을 보고 진실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수단이다. 그는 미술의 양식이나 색채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과 현실 세계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경건할 만큼 소박한 태도로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려내는 건강한 리얼리즘을 예술의 기초로 삼고 있다.”
사업에서건, 그림에서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같은 곳인지 모른다. 다음과 같은 박 회장의 소회가 그 단초를 제공한다.
“좀 살아봐서 압니다만, 우리의 삶이 모두 사실은 아닙니다. 사회가 조장하고, 자본이 구속하고, 시간이 옥죄어 만든 허상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삶을 사실로 만나려면 경계(境界)까지 가봐야 합니다. 경계에서 보는 사실은 훨씬 서사(敍事·기승전결의 구조)적 사실입니다. 그것은 드뷔시의 ‘바다’ 같거나 마네의 ‘오후’ 같습니다. 바람의 차가운 냄새, 풋풋한 젊음, 늦은 안식이 있습니다. 거기까지가 나의 경계입니다.”
팔순을 훌쩍 넘긴 노구를 이끌고 박 회장은 그 경계에서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