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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에 마지막 인생을 담아서(정용구 논설위원)


“죽은 후에 천추만세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것보다는 살아생전에 막걸리 한 잔만도 못하다”(死後千秋萬歲之名 不如生時濁酒一杯)는 말이 있다. 사후의 세계보다 살아생전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다. 고려 의종(毅宗) 때 대문호 이규보(李奎報)가 아들과 조카에게 준 시(示子姪)를 보면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그려져 있다. 죽은 후에 자손들이 철따라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한들 죽은 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세월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 가묘 나 사당(家廟, 祠堂)에서도 멀어지면 어느 후손이 찾아와 성묘하고 돌볼 것이냐고 반 문했다.

 옛날같이 3, 4대가 함께 살던 대가족으로 수백 년을 이어 오던 때와 달리 핵가족화 로 겨우 명맥(命脈)만 이어가는 현실에서 보면 춘경(春卿: 이규보 號)의 예측이 천년 을 내다 본 혜안(慧眼)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는 찾아오는 후손 하나 없고 무덤이 황폐화되어 초목이 무성하니 멧돼지나 산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고, 무덤 주변에는 외뿔소가 울고 있을 것이라 상상이 된다.

 산마다 능선에 고금(古今)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넋은 있는지 없는지 누 구도 알 수 없다고 탄식하여 사후세계를 연연하지 않았다. 이어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조용히 앉아서 혼자 생각해 보니 (靜坐自思量) 살아생전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 것만 못하네 (不若生前一杯濡) 내가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노니 (我口爲向子姪噵) 이 늙은이가 너희를 괴롭힐 날 얼마난 되겠는가

 (吾老何嘗溷汝久) 꼭 고기 안주 놓으려고 하지 말고 (不必繫鮮爲) 술상이나 부지런히 차려다 주렴 (但可勤置酒)” 조용히 생각해보니 사후의 일보다 살아 있을 때의 삶이 더 소중함을 깨닫고 자손들 에게 한잔 술로 목이나 축이게 부지런히 술상을 차려주는 것이 효도라고 했다.

 자신은 이제 서산에 지는 태양과 같은 신세인데 자손들을 괴롭힐 날이 얼마나 되겠 느냐면서 힘들게 고기 장만 하려 들지 말고 나물 안주와 막걸리(濁酒)라도 좋으니 날 마다 술상을 차려 달라고 쓸쓸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만년의 문신 이규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쌀밥에 고기반찬의 진수성찬도 아니요 부귀공명(富貴功名)도 아니며 불로장생(不老長生)도 아니다. 

다만 자식들이 살아생전에 목이나 축이게 술상이나 부지런히 차려주는 것뿐이었다. 이 얼마나 소박(素朴)한 노인의 꿈인가? 비록 막걸리일망정 떨어지지 않고 마시고 싶 다는 소망이 눈물 겨워진다. 이 시(詩)의 내용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당시의 농경시대(農耕時代)에 어 려운 환경에서 있었던 배경으로 어쩌면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현대사회는 상상을 초월 한 문명의 발전으로 화려한 생활문화를 접하면서도 생전에 모든 혜인(慧人)들의 한 (恨)과 꾸밈없는 소망이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 그렇다하지만 살아 있는 부모이기에 자식 생각에 병이 들고 귀여운 손자 손녀가 보고 싶어서 먹는 음식마저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 그리움에도 따로따로 참고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이 시대의 아픔에 대한 문제해결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지질하게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잘살아 보려고 밤낮없이 고생으로 청춘을 불태워버 린 그 세월의 역꾼들은 나라는 부강(富强)해져 살만하지만 육신은 벌써 늙어 버렸고 죽음 앞에서 외롭게 의미 없는 생을 살아가고 있다. 거리에서 혹은 공원에서 애완동 물을 품에 안고 비비고 쓰다듬고 사랑을 쏟아붓는 나들이 가족들을 바라보는 부모들 의 심정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보다 개팔자가 좋구나’라고 넋두리 타령을 했을 상 싶다. 오늘이 보석 같은 인생이 되어야 내일의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인데춘경(春卿) 이규보처럼 막걸리 상(床)은 없어도 송두리째 청춘을 빼앗긴 시대의 주인 공인 혜인(慧人)들은 숭늉 물로라도 사는 날까지 아프지 말고 삶의 승리자로 기억되 었으면 한다.


                                                                         논설위원 정 용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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