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은 썩은 정치로 고달픈데 가슴을 적시는 감동실화를 독자와 함께하고자 옮겨 드립니다.
나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컴퓨터 장사를 하고 있으며 며칠 전 오후 6시경,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아는 사람 소개라 하고 여긴 경상도 칠곡이라는 곳이라면서 딸애가 초등학교 6학년으로 지금 서울에서 할머니하고 같이 사는데, 중고품 컴퓨터라도 있었으면 해서요” 어림잡아 4~50대 아주머니인 것 같았다.그러면서 적당한 물건이 나오면 연락을 해달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열흘쯤 지나 쓸 만한 컴퓨터가 들어와 아주머니께 연락하여 딸이 사는 서울집 주소를 알아내서 그 집을 찾아 가게 되었다. 다세대 건물 안쪽 자그마한 샤시문 앞에 할머니 한분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안에 악세사리를 조립하는 부업거리가 가득히 쌓여있는 걸로 보아 형편이 넉넉지 않는 것 같았다.
컴퓨터를 조립하고 있는데 그 사이 6학년 딸아이가 들어오면서 “야- 컴퓨터다.”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마치 내가 컴퓨터를 구해준 것처럼 좋아했다.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어린 소녀였다.
할머니가 아이의 어께를 도닥거리면서 “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니 엄마가 사준거여, 어여 학원에 다녀와라” 아이는 “네...”하고는 후다닥 나갔다.
설치를 마무리하고 돌아가려고 나서는데 버스정류소에 아까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어디로 가니? 아저씨가 태워 줄게” 주저할만도한데 아까 봤던 아저씨라 마음이 놓이는지 아이는 씨익 웃으며 “하계역이에요” 라고 대답했다.
가려는 방향과는 반대였지만 태워다 주기로 했다. 집과 학원은 너무 먼거리였다. 십 분쯤 갔을 때, 화장실이 급하다하여 패스트 푸드점이 보이길래 차를 세웠다. “아저씨는 그냥 가세요.” 아이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황급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것이니 기다려서 태워주어야지 하고 조수석을 보는 순간 검붉은 피가 묻어 있어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6학년 아이가 첫 생리인가? 직감을 하게 됐다. 시트를 적신 걸 보니 속옷과 바지도 다 버렸겠구나, 차에서 뛰어 내리며 당황하던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당장 화장실가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처음이니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며 울상 짓고 있을 아이 모습이 떠올라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마음이 너무 급해졌다. 아이가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차에 비상등을 켜두고는 옷 가게를 찾았지만 주변에는 아무런 상점도 없었다.
마음은 조급한데 별별 생각이 다 났다. 첫 생리 때 엄마가 옆에 없는 어린아이가 몹시 애처로웠다. 청량리 역 근처에서 황급히 속옷가게를 찾았다.
사이즈를 알 도리가 없어 제일 작은 것부터 위로 사이즈를 두 개 더 샀다.
속옷만 사서 될 일이 아니어서 집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택시타고 청량리역으로 좀 와 하니, 그냥 오면 될 것을, “왜 무슨 일인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하자마자 집사람이 알았다 하더니 택시를 타고 빨리 온다고 했다. 아내가 ‘구세주’ 였다.
아내는 다급히 “약국에 가서 생리대 xxx 달라고 하고, 그거 없으면 ooo 달라고 해. 속옷은?” “샀어” “치마도 하나 사고, 편의점에 들려서 아기 물티슈도 하나 사” 아내의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지휘 덕분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고 아내를 태워 그 아이가 내린 건물로 급히 차를 몰았다. 그동안 어떻게 처리하고 갔을까? 없으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아이의 이름도 모른 상황에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기 때문이다. 집사람이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세 칸 중에 한 칸이 잠겨 있었고...“애 있니? 아까 컴퓨터 아저씨네 아줌마야~” 말을 건네자 안에서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네~~”했다고 했다.
그때까지 그 안에서 혼자 울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평범한 가정이라면 축하받으며 조촐한 파티라도 벌였을 텐데...
콧잔등이 짠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어린애 혼자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차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의 문자가 왔다. “옆에 꽃가게가 보이던데 꽃 한다발 사와” 이럴 때 어떻게 축하해 줘야 하는지를 몰라 서성거렸는데 선뜻 보이는 중에 제일 예쁜 꽃다발을 골랐다.
패스트 푸드점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데, 아이와 아내가 나왔다.
아이의 눈은 퉁퉁 불어 있었다. 아내를 처음 보고서 멋쩍게 웃어 보이다가 챙겨간 것들을 보고서 막 울기 시작했었다고 한다. 아내의 얼굴에도 눈물자국이 보였다. 저녁을 먹여서 보내고 싶었는데 아이가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집 앞에 내려줬다. “아저씨 아줌마! 너무 고마워요...”하고 울며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어린 소녀를 보며 우리 내외도 눈에 이슬이 맺혔다.
아내와 돌아오는 차 속 대화에서 그 집 사정이 여의치 않음을 안 아내는 “그 컴퓨터 얼마에 팔았어?” “22만원” “다시 가서 주고 오자” “뭐?” “다시 가서 계산 잘못했다하고 할머니한테 10만원 드리고 와” 중고 컴퓨터 값이 내렸다는 등 적당히 둘러 대면서 10만 원을 할머니에게 드리고 왔다.
나는 내심 아내의 통 큰 마음에 놀랐다. 그날 밤 11시쯤 아이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기 칠곡인데요, 컴퓨터 구입한...” 이 한마디를 하고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곤 목이 메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아내도 눈이 빨갛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필자 또한 이 감동 실화를 옮겨 놓으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썩어빠진 정치에도 선민의 삶은 이토록 도도(滔滔)히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논설위원 정용구